모처럼 문구점에 갔다가, 파란 꽃무늬가 그려진 80장 들이 미니 앨범을 사왔습니다. 졸업
사진에, 예전에 모 취업 사이트에 소개될 때 그쪽 분이 찍어 주셨던 이미지 사진들 하고....
. 그런 것들이 책상 서랍 속에 뒤죽박죽이 되어 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 답답해 지더군요.
그래도 한때 머물렀다는 흔적일텐데. 인간의 역사에서 개인의 그런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리고 아마 다시 돌아볼 일도 거의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선택해서 머무를 수
있었던 그 곳에서 행복하게 지냈더라는 기억은 오래 갖고 있고 싶은 것입니다.
서랍을 뒤집어 엎어보니,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하더군요.-_-;;;;;;;
중, 고등학교 때 여기저기, 학교에서 강제로 가자고 해서 끌려갔던 많은 여행에서 찍어 온
많은 사진들이 그 안에 그득히 들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다시 넘겨 보지도 못할 사진들
을 많이도 찍었던 걸까요? 바보같으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차피 대학교 때의 사진이래
봐야 40여장 밖에 없으니, 한번 보관해 놓을 만한 것을 골라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때의 사진들은, 그래도 많이 웃고 있었습니다. 표정도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방
긋 웃는 모습들. 하지만, 내 얼굴이 한때 저 모양이었단 말이야! 하고 경악을 하게 하는 사
진도 가끔 있더군요. 얼굴만이 아련하게 기억날 뿐, 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 아이들
의 웃음은 조금은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경직된
표정으로 찍었던 졸업 앨범을 열어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지지리~도 싫어하
던 몇몇 teacher의 얼굴도 들어 있을 테니 더더욱.)
고등학교 때 찍은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정말, 다섯 통 반의 필름을 소모했던 제주도 수학
여행의 사진에서, 제 얼굴이 들어간 것은 열 장도 채 되지 않았지요. 만장굴에서 선생님께
부탁해서 찍은 것 하나. 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도, 어차피 학생을 두고 버스가
떠나지는 못한다는 깡으로 일출봉에 올라가 찍은 사진 하나. 혼자 어깨를 수그리고 다니
던 그 때의 모습들과 함께, 묘하게도 카메라 쪽을 바라보지 않는 수없이 많은 아이들의 사
진들.
아마도 그렇게 보고 있었나 봅니다. 그렇게, 한참을 눌러 기다리지 않으면 잘 작동도 안 하
던 중고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바라 보았던 모습들은. 아마도 같이 다니고 싶어, 같이 이야
기하고 싶어 하고 말하고 있었겠지요. 3년 내내 잡탕차에 타겠다고 자원했지만 번번히 담
임 선생님들이 말렸던 일도. 그렇게 하나씩 생각이 났습니다. 묘하게도, 얼굴도, 이름들도
기억나지 않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함께. 생경해 보이는 그 얼굴들과는 반대로, 그때, 저 애
들과 놀고 싶었다는 그런 안타까움만이 골라 낸 백여 장의 사진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시간을 기록한다..... 라는 것은 일대 혁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잇장에 갇혀진 개인
사를 들여다 보는 것은 나름대로, 우울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캠코더
같은 것으로 일상을 찍는 사람들은, 과연 그 영상을 언젠가 되돌려 볼 것인가. 궁금해 졌습
니다.
사진을 정리한다는 것은, 일종의 개인사의 정리라고 보면 맞겠죠.
가끔은 책상을 정리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끗하고 멋져 보이는 책상이라도,
가끔은 보지 않는 책과 사용하지 않는 서류뭉치를 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그런
계기가, 새 학기라던가, 새 학년이라던가, 혹은 뭐, 개인에 따라서는 실연도 계기가 된다고
합니다만. 아직 실연을 당해 보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여간.
그것과 같은 식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을 부분들은 들어 내어도 상관 없는 것이라 생각합
니다. 아마도...... 기억 속에는 남아 있겠지만, 그 기억을 증명할만한 것은 정리해 버려도
되지 않는 것일까......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들의 사진이 한 뭉치 가득 비닐봉지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폐품 내놓는 날 쯤 해서 내다 버리면 되겠지요. 아마, 불을 붙이면 잘 타지 않을까....
. 하고 중얼거리면서. 너희들의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렸어. 거리에서 만나도 알아 보지 못
할 거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만화 "fresh"의 마지막에서 나현수가, 오염된 기억을 모두
버리고, 새롭게, fresh하게 모든 것을 포맷해 버리기를 원했던 것 처럼, 그런 그녀를 김인수
가 "바보"라 불렀다 할 지라도. 그렇게 하나의 기억을 정리해 갔습니다.
앨범 속에는, 조금 신경질적인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중학생의 사진과 함께, 멍한 표정
으로 우울과 짜증만이 녹아나는 얼굴의, 만들어진 가면같은 얼굴의 고등학생의 사진이, 행
복한 미소를 짓는 대학생의 사진 앞에 들어갔습니다. 학사모를 쓰고, 어색하게 찍은 사진
과, 오딧세이와 함께 전산실에서 찍은 사진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