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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모처럼 네 전화를 받았네. 마침 컴강의 듣던 거 끝나고 이불 펴던 중이라서 깔다 만 이불에 주저앉아서는 네 목소리 들으니까 편하고 좋더라. 더 빨리 걸었으면 강의 듣던 거 꺼야 했을 거고, 더 늦게 걸었으면 잠을 자거나 책을 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동영상이라도 하나 보고 있었을 테니까 딱 맞는 시간에 전화한 거 맞아. 가끔씩은 오빠랑 너를 평균을 내 놓으면 상당히 괜찮지 않을까 싶어. 일단 결단력 있고 인간관계 시원시원한 너와, 신중하고 어른스러운 오빠. 두 사람을 평균내면 딱 내 이상형인데 아깝지 뭐. 게다가 두 사람 다, 그건 어떻게 괴롭히거나 구박해서 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세이는 술자리에 끌고 가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요, 너야 일단 사고부터 치고 보는 주의니 이걸 어쩐대니. 그래, 난 네가 잘 해 나가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가끔은 그런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 "하나도 힘들지 않아서 그게 더 마음이 힘들다"는 네 말을 듣는 것이 난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파. 기질 자체가 예술가 같은 너니까, 한 자리에 묶여 있는 것이 오히려 더 갑갑하게 느껴질 지는 모르겠지만 더 너를 힘들게 하고, 더 비바람을 맞기 위해 돌아다니는 네가 가끔은 안타깝다. 하나는 네가 방황하는 것이 마음 시려서이고, 또 다른 것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자체가 힘든 것일수도 있는데, 굳이 고통이라는 것을 사서 겪어야 하는 것 처럼 그러는 네가 조금 더 주변을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내가..... 대학을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멀쩡하고 취직해서 살아가는 것, 사실 초등학교 6학년때의 선생부터 시작해서 믿는 인간 별로 없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일상에 치이는 모습에 너는 실망하지 않았는지? 너는 나를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때때로 타성에 젖는 내 모습에 돌아 버릴 것 같다. 남 보기에 멀쩡한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해서 타성에 젖어야 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퇴근하면 사실 책이나 보고 뒹굴거리다가 일찍 잤으면 하는데, 굳이 이것저것 공부하고 생각도 하고 소설도 쓰는 것은 일상에 너무나 잘 적응해서 순응해 버릴 것만 같은 내 모습이 짜증나서야. 결코 내가 학구파라서가 아니라구. 내가 타성에 젖은 사람이 되면, 너도 실망할 지 모르겠다. 물론 내 자신이 먼저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죽을 지경이겠지만. 너에게 내가 희망이라면, 난 계속 희망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내가 조용히 하루하루를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주어진 것을 다 떨치고 네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너와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난 한번 정한 것은 완전히 버리는 법은 없어, 조금 진로 수정을 할 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뒤엎지는 못해. 난 그런 인간이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책써서 인세 받은 것으로 먹고 사는 인간 중에 일본에서 상위 랭크되는 나카타니 알지? 그 사람도 젊었을 때 너 이상으로 삽질하고 다닌 아저씨다. 가끔 네가 옛날에 제목보류에서 글 쓴다고 그러던 생각도 난다. 언젠가는 네가, 한국의 나카타니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나중에 유명해지면 모른 척 하지나 말고, 맛있는 거 많이 사주고 그래. 난 맛있는 게 있으면 먹어도 굳이 찾으러 다니지는 않는 타입이잖냐.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챙겨줘야지. 안그래? 그나저나 삽질하지 마. 네가 없이는 나도 즐겁지 않아. 조용히 멀리서 친구라 불리는 여자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구경만 하겠다는 것은 70년대 연애소설에나 나올 내용이겠다. 그리고 나같이 별스럽고 우체통에 불 지르는 꿈 안 꾸면서도 너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자 세상에 분명히 있다고 봐. 장래성 있는 남자를 알아보는 여자는 꼭 있거든, 지금 당장은 네가 백수이건 전산실 구석에서 거미줄이 끼게 앉아 있는 음침한 인간이건 간에 말이야.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한탄하지 말고, 언젠가 그녀를 만났을 때 첫눈에 간택당할 수 있도록 뱃살 빼고(-.-;;;;) 책도 읽고 술은 줄여. 그래서 나중에 부부동반으로 kevin 녀석을 만나러 미국으로 쳐들어가 버리는 거야. 체제비를 줄이기 위해 놈에게 얹혀서 숙식 해결하고. 이건 너무 심했나? ^^;;;;; 그래야 해. 서로 바쁘고 나이 먹을수록 연락 뜸해지는 것은 할 수 없겠지만, 완전히 멀어져서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것 따위는 내가 용납 안해. 알았지? 이제 나이가 나이다..... 술 먹고 마음 시려서 전화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술 적당히 마셔라. 자, 봐라! 나는 남자친구보다 오래 묵은 친구를 더 위하는 인간이 아니냐! 전에 세이가 한번 성당쪽 친구들과 술먹고 전화했다가 나한테 죽을 뻔한 적이 있지 않았니, 버릇 나쁘게 술처먹고 전화할 거면 다시 전화하지 말라고 엄청 욕먹었단다. 너한테 내가 그러디? 어, 난 너랑 kevin 말고 딴 놈이 또 술처먹고 전화하면 "미친 놈. 작작 처마시지." 하고는 끊는 인간이란다. ^^;;;;; 너도 알겠지만 나의 인간성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고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꽤 성질 사나워서 말이야. 하.하.하......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소중하지만 너도 만만치 않게 소중해. 몸 조심 하고, 날 추운데 술 먹고 늦더라도 꼭 집에 들어가서 자. 남자건 여자건 외박하는 거 그렇게 좋은 버릇 아니야. 잠자리는 가려 자랬다고. 안녕. 사랑하는 황에게. 혜진이가. ps) 다음 월급날에 밥 사줘. 신촌에 도리아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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