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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그리고 어쩌면 비겁한 물러섬

등록 2001-10-17 11:49:46     조회 936
이름 혜진~    

오늘 아침, 마치 화장이 무기라도 되는 양, 모처럼 공들여 화장을 하고 티셔츠에 청바지보
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괄시하던 정장을 꺼내 입었습니다. 먼지가 더캐로 앉은 채 용케도 
신고 다니던 구두에도 광을 냈습니다. 오늘은 제가 드디어, 그 동안, 99년 3월 중순부터 끈
질기게 관리해 오던 웹서버를 오딧세이에게 넘기기로 결심한 날입니다.

어제는 밤새 앓았습니다. 아니, 사실은 집에 가다가 정신을 잃을 뻔 해서 오딧세이는 거의 
업듯이 질질 끌고 가기도 하고, 택시 안에서 부득이하게 뺨을 때려 깨우기도 했습니다. 머
리가 깨질 것 같은 기분은 몸살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싸움을 했었습니다. 대학 4학년이나 
된 게 싸움을 하냐고 웃을 일이기는 합니다만..... 정말 실망하고 절망했지요. 아직도 대한
민국에서는, 심지어는 이런 학교 안에서 조차도, 규칙대로 바르게 행동한 것이 비난을 받
고, 뻔한 잘못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고 해서 내려와서 행패를 부려도 되는 곳인가 봅니다. 
그것도 하늘같으신 선배님의 잘못에 대해서는 미천한 후배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인 모
양이죠..... 규칙대로 했다고 해서 감히 그런 짓을 했다는 식으로 당해 드려야만 하는 곳이 
사회인 모양이지요.

과 안에는, 대학원에 계시는 선배님이 관리하시는 많은 컴들과..... 그리고 학부생이 관리
할 수 있는 웹서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에 부적절한 접속이 들어오는 로그는, 당연
히 담당하시는 교수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그런 부적절한 접속을, 
선배가 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사실, 같은 과 안에서 지원까지 받으며 해킹을 공부하는 사
람들이 있는 이상 그런 일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 전에 관리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만 
해 주었더라도 넘길 수 있는 일일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언반구 말이 없다가, 마치 후배
들이 만지는 서버는 멋대로 해도 된다는 식으로 그런 접근이 들어오는 이상, 보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제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들은 말이지만, 모든 종류의 불법적인 접속은 그 시도 만으로도 범죄가 성립한다고요. 소
매치기를 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채 붙들렸더라도 그것은 범죄인 것 처럼.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범죄 연습에 속한 것이었으니까요.

마음이야 안 좋았죠. 얼마나 우리를 무시하면 태연히 저런 짓을 했을까. 예, 분명히 그런 
것 있었겠지요. 후배이고 어차피 엄포나 놓고 소리나 지르고 주먹이나 흔들어 보이면 찍소
리도 못할 것 같은 여자아이(라고는 하지만, 열 받으면 저의 독설도 거의 강철 혓바닥에 가
깝기는 하죠...emoticon). 하지만 그 부분은 우리가 말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우리
가 할 일은 보고를 해서, 앞으로라도 사전 통고를 한 다음에 그와 같은 실험을 해도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지, 선배들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감기 몸살을 앓
고 있어 열이 꽤나 났으면서도, 그냥 있다가는 동아리의 분들과도 사이가 틀어질 성 싶어 
집에 바로 가지도 못하고 동아리 회장 선배와 한참을 잘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아리를 문
닫게 하려고 교수님께 보고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보고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요. 예, 회장 선배도 잘 모르고 계시던 일이었고 해서, 이야기는 잘 끝났습
니다. 그리고 몸도 안좋고 하니 집에나 일찍 갈까 하고 하던 일들만 마무리를 짓고는 전산
실에서 짐을 챙겨 나오는데 일은 터졌습니다.

고학번 선배가 동아리방에서 내려온 거죠. 네가 감히 그럴 수가 있냐는 듯이. 그냥 무시하
고 사물함 있는 곳으로 걸어갔지만, 겨우 마음 속에 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져 나왔습니다. 
동아리 방에서 겪었던 일들과, 지금 당하고 있는 저 횡포에 관하여. 뒤따라와서 난리를 치
는 선배들에게 듣고 있는 욕을 그대로 되돌려 쳐 줘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전산실로 돌아
갔습니다.

오딧세이 : "어디 가는거야?!"
혜진 : "전산실에 백업하러 가! 저 대단하신 해킹 동아리께서 혹시 또 알아? 해킹해 들어와
서 밀어버릴지?!"

으음..... 지금 쓰다 보니 무식한 대처이기는 했네요. 끝까지 고고하게 무시해 버릴 것을. 
네가 감히 그럴 수가 있느냐가 아니죠. 저는 분명히 회장 선배에게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
을 잘 설명해 드린 것을. 회장 선배보다도 선배였던 그 선배로서는 "네가 감히!!!" 였겠지만
, 과 기물을 맡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과 기물에 감히!!!" 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으니까, 
가만히 있었으면 제가 이기는(emoticon;;emoticon 건데. 하여간 그랬습니다. 그리고 전산실에서 백업용 
디스크를 마운트시키고 어쩌고..... 하고 일어나는데,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일어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몸에 어울리지 않게 비척비척 하면서 오딧세이에게 끌려
 집으로 가다가, 결국은 버스를 타고 들어갈 자신이 없어 택시를 잡아타고 가좌동으로 향
했습니다.

사실은 하루라도 빨리 넘기고 싶었죠. 많은 교과목, 취직 준비. 무엇하나 호락호락한 일이 
없는 판에. 하나라도 일을 줄이고 싶은 마음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게다가 불안한 후
배가 아니라, 저같은 초보보다 훨씬 컴들에 조예가 깊은 오딧세이에게라면 말이죠. 하지만
..... 이런 식으로 넘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이제 더 이상은 저 서버 때문에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두통 속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은 그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저 녀석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
는 비겁함.

어쨌건, 그런 면에서는 저보다 더 얄짤없게 구는 인간이 오딧세이인데, 어디, 한주먹거리
도 안 되는 여자 후배가 아니라 남자 후배라면 그래도 그렇게 나올 수 있을지, 이제부터는 
구경을 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공강 시간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언
제 누가 부를지 조바심을 내던 시간은 끝입니다. 이제 저에게도, 10개월이 조금 안 되는 대
학 생활다운 대학 생활이 부여되었다고 생각해 볼까 합니다..... 단지, 그 선배들의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투명인간인 것 처럼..... 모르고 지나가는 것 처럼,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나 말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늘 얼굴만 보면 태연한듯 내뱉던, 지독한 
빈정거림과 억지에서도 이제 해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저는 책임자가 아니니까요
. 그런 말을 들을 이유도 없어졌으니까요. 그래도 그럴까요? 그 선배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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