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통재라.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꽃다운 소녀의 얼굴에는 거미의 흔적이
들어 만월같은 꽃이 지고 말았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한 때 만인의 연인이라 불리던, 나 세하가 이제 만인의 누나가 되는 것인가?
아마 적수 녀석이 '세하누님'이라고 칭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꽤 나이든
아줌마쯤으로 아나보다. 또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우리 짝지를 탓하던가.
나, seha는 만인의 누나보다 만인의 연인이 더 좋을 나이인데?
대학 1학년 때 친구 녀석은 아직도 내 취미가 남자 울리기나 뒤에 줄서는 남
자 수 세어보기인지 아는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고-그럴 능력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아? 멍석 깔아줘도 춤추겠다 쳇!- 그럴리도 없고, 그랬다가는 아마
울 짝지 울테니까 그러지도 못한다. 난 역시 비단결같이 고운 마음씨를 지닌
걸까? 뭐 가끔 이렇게 허튼 소리를 해서 만인이 즐거워 한다면야, 약간의 푼
수끼 지닌 행동까지 하는, 그런 여유조차 있는데
생각해보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별거 아닌 것 같다. 조금 덜 도도해지고,
조금 덜 교만하고,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인다 하지 않던가? 그게 젊음의 교만
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초라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 과
정을 통해 인간은 삶을 완성하는 것이고 -왜냐면 탄생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
에서 거쳐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결국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해당하
지 않는 별난 인간도 존재한다- 또 다른 의미를 재획득하는 것일테니까.
대학 1년 때의 나? '어머 어떻게 그런..'이 입에 달려 있는 도도해여사가 아
니였던가?
하, 정말 이제 나는 만인의 연인에서 누나로 비켜가야할 나이인가?
내게 나이를 물어보면 나는 간단하게 대답해버린다. Female Dragon. 뭐 대충
알만한 말이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여자라고 괄시당하던 옛생각, 피해의식
덕분에 그렇게 대답한다.
전공이 뭐냐고 하면, 엄청난 공순이 컴플렉스와 전공은 쥐뿔도 모르는 열등
의식 덕분에 교양학과라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교양이 철철 흐르는 여자는
아니다. 전공은 전산이다. 어쩌다가 우연하게 공학사 학위는 땄다. 아마도
지나가다가 종이 한장이 남아서 내 몫으로 교수님들이 미운 정에 넘긴 것 같
다. 그만큼 난 전공과 무관한 학교 생활을 했다. 자랑도 아닌데
;
간만에 주룩주룩 비가 오고 있다. 이런 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이런 날,
지금처럼 불 죄다 끄고 음악 들으며 가끔 시 한편 읽고 사색하고, 괜시리 혼
자 우아해지려고 한다.
블루마운틴과 이렇게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하며 구속되는 것은 절대 베겨내
지 못한다. 쉽게 말하면 '사랑한다' 라는 말을 듣는 것도 싫고, 하라는 것도
싫다. '왜 좋아하느냐' 라는 질문도 싫어한다. 내 중학교 동창은 내게 '너같
은 별종은 천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다'라고 한다. 나도 괴짜인걸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연애도 싫다. 그럼에도 지금 연애중인 것은 내가 잘 버티거나
잘 참는 것이 아니라 짝지가 나를 잘 밟고 있는 것이다.
성질은 무지 급하고 덜렁대는터라 요 며칠전에도 계단에서 구르는 쾌거를 이
루었다. 덕분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다.
거참 난 정말 만인의 연인이 좋은데, 정말 누나로 전락되어야 할 나이인가?
이제는 처음 보는 사람조차 누님이라고 해버린다. 이 죄를 모두 적수에게 뒤
집어 씌운 다음에 다시 연인으로 등극할까?
안그래도 펑퍼짐해져 가는데, 누님은 역시 그런 이미지잖아?
아, 아직은 소녀이고 싶다.
- 주책맞은 누님, 1999. 5. 23. PM 11:21